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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명조)때 세워진 왕한림(王翰林) 저택, 원명은 천관저(天官邸)로 안거(安居) 고성의 명청망족(明清望族) 왕씨의 고택이다. 화룽산(化龙山) 아래에 자리 잡고 있으며 속명(俗名)은 맹호도안(猛虎跳岸)으로‘화룽산(化龙山)은 뒤에 있고, 몸 앞에 쌍옥환이 있으며, 천 명이 일제히 손을 내밀며, 만개의 밝은 등잔이 오기를 기다린다.’는 시를 찬양하기도 했다.
왕씨(王氏) 가문에는 명조(明朝)때부터 왕검(王俭), 왕억(王亿), 왕빈(王宾) 삼진사(三进士)와 왕인(王寅), 왕천(王宸), 왕기(王寄), 왕길사(王吉士) 네 명의 거인이 있었고, 청나라 강희(清朝康熙), 건륭년간(乾隆年间)에 와서도 왕서(王恕), 왕여가(王汝嘉), 왕여주(王汝舟), 왕여벽(王汝璧) 부자 삼진사(三进士) 일거인(一举人)을 속출하기도 했다. 왕서(王恕), 왕여가(王汝嘉)는 부자 한림이고, 왕여벽(王汝壁)은 전국의 저명한 시인으로 파유대종(巴渝大宗)이라 불리웠다. 읍인(邑人) 담창달(谭昌达)은 아래와 같은 시를 읊었다:
신룡(神龙)은 한번 보기만 해도 숨어 있고, 그 당시 분수가 없었던 일들은 묘연하기만 하구려.
오직 왕가만(王家)이 과제가 성할 뿐, 길거리에는 목패방(木牌坊)이 우뚝 솟아 있네.
왕한림(王翰林) 저택은 산을 따라 지어져 삼진원락(三进院落)을 조성하였으며 정전(正殿)은 2001년에 철거되였고 현재는 중전(中殿)과 후전(后殿)만 남아 있다. 후전(后殿)은 민국(民国)초에 왕가(王家)의 사위이자 항일애국장교인 유정염(刘靖炎) 장군이 거주하던 곳으로, 유백승(刘伯承)원수가 1916년 안거(安居)에서 부상을 치료하려 이곳에 머문적이 있다.